11.05.2015 | ||
베를린에서 벌어진 대규모 강간 | ||
70년 전 소련이 나치 독일을 물리친 것은 러시아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순간으로 기억됩니다.
반면에 소련군이 베를린 점령 당시 독일 여성들을 상대로 자행한 대규모 강간 사건은 그다지 기억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베를린의 근교에 서 있는 12미터 조각상은 소련 병사가 한 손에는 칼을 쥐고 다른 한편에는 독일 소녀가 부서진 나치 상징을 밟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 조각 밑에는 1945년 4월 16일부터 5월 2일까지 벌어진 베를린 전투에서 전사한 80,000명의 병사 중 5,000명이 묻혀있습니다.
조각상의 규모는 소련군의 희생을 잘 보여줍니다. 조각상 위로 올라가면 소련 인민들이 파시즘으로부터 유럽의 문명을 구했다는 글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 기념비를 '알려지지 않은 강간범의 묘'라고 합니다.
스탈린의 군대는 나치의 수도로 향하면서 셀 수 없는 여성들을 강간하였습니다. 이런 사실은 독일에서는 여전히 묻혀진 일이고 러시아에서는 현재도 극히 금기시되고 있습니다.
러시아 언론은 소련군에 의해 자행된 강간을 서구 언론이 만들어낸 신화라고 부정하지만, 이런 사실은 젊은 소련 장교의 일기에는 이런 사건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중부 우크라이나 출신의 젊은 유대계 중사 블라디미르 겔판드는 1941년부터 종전까지 군 내부에서 금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믿기 힘들 정도로 솔직한 일기를 썼습니다.
1945년 2월 겔판드는 오덜 강의 댐에 배치되어 베를린을 향한 진격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그의 동지들이 여성으로 이뤄진 대대를 무력으로 포위해서 진압하는 것을 목격하고 기록합니다.
"생포된 독일 암캐들은 자신들의 죽은 남편들을 대신해서 복수하고 있다고 한다. 이들은 아무런 자비 없이 죽여야 한다. 병사들은 여자들의 음부를 칼로 찔러 죽이자고 우겼지만 난 그냥 총으로 처형하도록 하였다."
1945
년 4월 25일 베를린에 도착하자 겔판드의 일기는 점점 더 읽기 힘든 내용으로 가득합니다. 겔판드는 스프리 강둑에서 자전거를
난생 처음으로 타봅니다.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다가 그는 피난 중인 독일 여성들과 마주치게 됩니다.
어눌한 독일어로 겔판드는 이 여성들에게 어디로 가고 왜 집을 떠났는지 물어보자 돌아온 대답에 이 피난민들은 소련군이 온 첫날 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그에게 알려줬습니다.
"저를 찔러댔어요", 한 아름다운 독일 소녀가 나에게 치마를 들어 올리며 속옷을 보여주며 말했다. "밤새도록요. 제 위에 계속 올라 타서 저에게 몸을 비벼댔어요. 20명이 넘도록요." 그녀는 울면서 말했다.
"'그들은 제 딸을 제 앞에서 강간했어요', 소녀의 엄마는 나에게 울면서 말했다, '밤 내내 와서 내 딸을 강간했어요.' 이 말에 난 치를 떨었다.
"'저와 함께 있어 줘요,' 딸은 갑자기 나를 부둥켜안으며 말했다. '저랑 같이 자요. 뭐든지 해도 좋지만, 오직 당신 하나라면 괜찮아요!'"
*
소련군이 베를린에 다다랐을 때는 독일군은 소련에서 이미 셀 수 없는 학살과 대규모 성폭행을 4년간 자행했었습니다. 겔판드는 이 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지나온 수많은 마을은 나치가 갓난아기까지 학살한 곳이 허다했습니다. 그리고 나치가 저지른 강간의 증거도 너무 많이 봤죠," 라고 그의 아들 비탈리가 말했습니다.
보통 독일 국방군은 '하급인종'과 성관계를 맺는 것은 상상하지도 못할, 규율이 엄하고 혹독히 훈련된 아리안 족의 군대라고 많이들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금기는 자주 무시되었다고 모스크바 고등 경제학교의 역사학자인 올레그 부드닛스키 교수가 말합니다. 나치 장군들은 병사들 사이에 창궐하는 성병 문제로 인하여 점령지에 어디든 집단 사창가를 세웁니다.
독
일 병사들이 러시아 여자들을 어떻게 다뤘는지 증거가 별로 남아있지 않습니다 - 거의 대부분의 여자는 살해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베를린에 있는 독일-러시아 박물관에는 한 독일 병사가 크라미아에서 수집한 사진첩에서 한 장의 사진을 보여줍니다.
"여자들의 시체들이 길가에 널브러져 있는데 모두 강간으로 죽은 거 같군요. 아니면 강간 후에 죽였던지요. 여자들의 치마가 벗겨져 있고 손은 얼굴을 가리고 있습니다."
"
너무 끔찍한 사진이라 박물관 내에서도 이걸 전시해야 하느냐 마냐에 대한 논란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이게 전쟁이었고 소련
점령지에서 시행된 독일의 정책이었습니다. 우리는 전쟁이 무엇인지 보여주려고 합니다. 전쟁이 어떻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니라
보여주는 것입니다."
소련군이 독일의 국경을 넘어 "파시스트 짐승의 굴"로 진격할 때 소련 당국은 병사들에게 그들이 당한 수모를 갚아주라고 적극적으로 권장했습니다: "독일 땅을 휩쓰는 그대, 복수의 시간이 다가왔다!"
발
트해 해안선을 끼고 독일에 도착한 소련 19군의 정치선전부 따르면 '진정한 소련 병사는 독일인에 대한 증오가 너무 과한 나머지
독일 여성들에게 성욕조차 느끼지 않아야 할것'이라고 선전했습니다. 하지만 나치군과 마찬가지로 소련 병사들도 정치선전 따위는
무시하였습니다.
2002년에 쓴 베를린 전투에 관한 책을 쓰면서 역사학자 앤터니 비버 교수는 러시아 연방 문서관리소에서 성범죄에 관련된 자료들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1944년 후반기에 소련의 비밀경찰인 NKVD에 의해서 작성되어서 총책인 라브렌티 베리아에게 보내진 것들이었습니다.
"이 문서들은 스탈린에게 보내진 것들입니다. 페이지 윗쪽에 읽었나 안 읽었나 표시가 되어있죠. 동프로이센에서 있었던 집단 강간과 독일 여성들이 강간을 피하고자 자기 자식들을 죽이고 자기도 따라 죽는 것에 대한 보고가 있습니다."
또
다른 약혼자를 기다리는 한 독일 여성의 일기에는 점령지의 여성들이 살아남기 위해 어떻게 상황에 대처했는지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히틀러가 지하 벙커 안에서 자살하기 열흘 전 4월 20일부터 시작하는 이 일기에는 암울한 상황에서도 유머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
맨날 똑같은 겨울 코트를 입는 창백한 얼굴의 금발여성"이라고 자기를 소개하는 이 일기의 작가는 자기 집 근처가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를 자세하게 적습니다. "회색 바지에 동그란 안경테를 쓴 남자는 가까이서 보곤 남자가 아니라 여자인 것을 알아차렸다. 그
옆에는 옷 수선집을 하던 집 딸 셋이 서로 부둥켜안고 걸어 다니는 것이 마치 블랙 푸딩처럼 보인다."
소
련군이 나타나는 것을 기다리면서 벙커에 숨어 사는 사람들은 블랙 유머의 대가가 된 거 같습니다: "러시아 놈들 밑에 깔려 있으면
머리 위에 떨어지는 것을 버틸 수 있을지도 몰라". 왠지 그녀들은 폭격으로 죽는 것이 강간보다 더 무서웠던 거 같습니다.
하지만 소련 병사들이 벙커의 문을 부수고 여자들을 끌어내자 안에 숨어있던 사람들이 러시아 말을 할 수 있는 그녀에게 대신 막아달라고 빌었습니다.
그녀는 위험을 무릅쓰고 폐허가 된 거리에서 소련군 장교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스탈린이 민간인에 대한 보복행위를 금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장교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어쩔 수 없이 벌어지는 것"이라는 답변만 돌아왔습니다.
여자는 냉담한 장교를 억지로 벙커 안으로 끌고왔습니다. 장교가 벙커 안에 있는 병사들을 책망하자 병사 한 명은 분노에 차서 장교에게 대들었습니다.
"나치가 우리 소련 여성한테 무슨 짓을 했는데!! 그는 소리를 질러댔다: '내 여동생을 그놈들이 데려가서...' 장교는 그를 진정시켜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하지만 그녀가 뒷골목이 안전한지 확인하러 갔을 때 그녀가 나오길 기다리는 병사들에게 잡혀서 수차례나 강간당했고 거의 죽을 때까지 목을 졸렸습니다. 겁먹은 "동굴 거주민" 들은 그사이에 지하실 문을 재빨리 잠갔습니다.
"
결국, 잠긴 문이 열렸다. 모두가 날 쳐다보고 있었다. 내 스타킹은 발목에 걸쳐져 있었고 난 다 헤어진 가터벨트를 손에 쥐고
있었다. 난 '이 겁쟁이 돼지들! 내가 두 번이나 강간당하는 동안 날 쓰레기처럼 내버려두다니!'라고 소리 질렀다."
곧
그녀는 "짐승때"로 부터 피하려면 "늑대" 한마리에 기대는게 더 견딜만 한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는 덜 폭력적이고 더 교환적으로, 더 애매모호하게 바뀝니다. 그녀는 레닌그라드 출신의 장교를 "붙잡았고", 인텔리였던 그와
침대에서 문학과 삶의 의미를 곧잘 토론하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나와 소령의 관계를 강간이라고 부를 수는 없어. 내가 베이컨, 버터, 설탕, 촛불, 통조림때문에 이런 짓을 하는 건가? 그것도 부인할 수 없어. 소령이 날 원하는 빈도가 줄어들자 난 그가 인간적으로 좋아진 것도 사실이야."
다른 여성들도 파괴된 베를린을 지배하는 정복자들과 비슷한 거래를 했습니다.
이 일기가 1959년에 "베를린의 여성"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을 때 작가는 독일 여성의 "명예를 훼손하였다"라며 엄청난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런 일로 그녀는 죽기 전까지 일기가 다시 출간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
전쟁이 끝난 지 70년 후에 미국, 영국, 프랑스 연합군이 저지른 성범죄에 대한 연구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런 연구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사회적 오명 이외에도 동독에서는 파시즘에서 독일 사람들을 구출해 준 소련의 희생과 전쟁 업적을 비난하는 것은 신성모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
지만 2008년에 베를린 여성의 일기가 영화화되었고 유명한 독일 배우 니나 호스가 주역을 맡았습니다. 이 영화는 많은 여성이
겪은 비극을 스스로 알리게 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제가 인터뷰한 잉게보그 불러트 씨도 그중에 하나였습니다.
현재 나이 90인 잉게보그 씨는 함부르크에 고양이와 옛날 사진으로 가득 찬 아파트에서 살고 있습니다. 1945년에는 그녀는 20살이었고 여배우가 될 꿈을 가진 베를린 여성이었습니다.
소련군이 시가전을 벌이기 시작하자 잉게보그 씨는 집 맨 꼭대기 다락방으로 숨어서 일기를 썼습니다.
"갑자기 거리에는 소련 탱크들이 나타났고 사체들을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습니다. 특히 저는 러시아 폭탄들이 떨어지는 소리를 절대 잊을 수 없어요."
공
습 사이에 잉게보그 씨는 호롱불에 쓸 실을 찾기 위해서 다락방에서 내려와야 했습니다: "갑자기 제 뒤에서 누군가가 총을 겨누고
있었습니다. 한 명이 저에게 옷을 벗으라고 명령했고 절 강간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나타나 순서대로 저를 강간했습니다.
그때 그들이 절 죽일 거로 생각했습니다."
잉게보그 씨는 그 당시의 어려움을 수십 년간 숨겨 왔습니다: "저희 어머니는 당신 딸이 소련군이 손대지 않았다고 믿고 그걸 자랑스럽게 생각하셨습니다."
강
간은 베를린 시 전역을 휩쓸은거 같습니다. 잉게보그 씨는 15세부터 55세 사이의 여성들은 식량 배급을 받으려면 성병 검사
보고서를 지참해야 했다는 점을 기억합니다. "병원에 검사를 받으러 갔을 때 여자들로 가득해서 발 디딜 틈이 없었어요."
자행된 강간의 규모는 어느 정도 일까요? 가장 자주 쓰이는 수치는 베를린에서 100,000만 명, 독일 전체에서 2백만 명의 여성들이 강간을 당했다고 봅니다.
독
일 국가 기록 자료실에 가면 베를린의 24구 중에 뉴콜른 구에서 1945년 7월부터 10월 사이 행해진 낙태에 관한 자료가
남아있습니다. 이 당시 독일 형법에 따르면 낙태는 불법이었지만 루크터한 씨에 따르면 집단 강간의 여파로 인하여 특별 예외조항이
생겨났습니다.
이
베를린 지역구에서는 1945년 6월부터 1946년 사이에 995건의 낙태 시술이 허가 내려졌습니다. 이 서류철에는 1,000장이
넘는 증언들과 자료들이 담겨있습니다. 아이의 손으로 삐뚤빼뚤하게 쓴 종이 한 장에는 부모님 앞에서 강간을 당했다는 증언도 남겨져
있습니다.
우
리는 제대로 된 강간의 규모를 알 방법은 없습니다. 소련 군사재판이나 다른 증거들은 여전히 비밀에 부쳐져 있고 얼마 전 러시아
의회는 2차 세계 대전 동안 소련군의 영웅적 업적을 비난하는 이는 최고 5년간의 징역형을 내리는 법을 통과시켰습니다.
*
과
거는 현재의 필요 때문에 재단되는 것이 운명입니다. 그렇기에 목격자들이 남긴 자료들은 극히 중요한 것입니다. 70년이 지나
진실을 밝히는 할머니들이나 그 당시에 큰 위험을 무릅쓰고 기록을 남긴 이들은 우리의 존경을 받을 만 한 것입니다.
블라디미르 겔판드의 아들 비탈리 씨는 소련군이 2차 대전에서 큰 용기나 엄청난 희생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다만 용기나 희생이 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최근 한 러시아 라디오와 한 인터뷰 후에 비탈리 씨는 SNS에서 반-유대주의자들에게 심한 비방을 겪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의 일기가 독일과 스웨덴에서처럼 러시아에서 출간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
만약 사람들이 진실을 알고 싶지 않다면, 그건 자신을 기만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전 세계가 무슨 일이 있었나 알고
있습니다. 러시아도 알고 있죠. (위의) 법을 만든 사람들도 자신들이 과거를 훼손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뒤를 똑바로
돌아보기 전까지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말이죠."
*
소련군이 빈을 점령 후, 스탈린은 베를린을 미국보다 먼저 점령하기로 결심, 250만 명의 장병과 6,000여대의 탱크와 40,000만 야포를 투입하였습니다.
4월 21일 소련군은 베를린 교외에 진입합니다.
22일 참모 회의에서 아돌프 히틀러는 패전을 시인하기 보다는 계속 싸울 것을 명령합니다.
소련군이 도시를 점령하는 과정에서 약 100,000 명의 여성이 강간을 당한 것으로 집계되고 있습니다.
4월 30일 히틀러는 자살을 하고 5월 2일에는 제국 의회는 소련군에 의하여 점령되었습니다.
2015년에는 BBC 한국어 온라인 서비스가 시작됩니다.
앞으로도 BBC 한국어 방송 캠페인에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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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이 지켜보는 러시아 병사와 독일 여성 커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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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게보그 씨: "제가 살아남지 못할거라 생각했어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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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미르 겔판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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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타는 블라디미르 겔판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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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BC News 코리아
11.05.2015 | ||
Massive Vergewaltigung in Berlin | ||
Die sowjetische Niederlage Nazideutschlands vor 70 Jahren gilt als einer der bedeutendsten Momente der russischen Geschichte. Gleichzeitig ist die massenhafte sexualisierte Gewalt gegen deutsche Frauen während der Besetzung Berlins durch die Rote Armee nur unzureichend im kollektiven Gedächtnis verankert. Ein 12 Meter hohes Denkmal in einem Berliner Vorort zeigt einen sowjetischen Soldaten, der in der einen Hand ein Schwert hält und mit der anderen ein deutsches Kind stützt, das auf ein zerbrochenes Hakenkreuz tritt. Unter diesem Monument sind 5.000 der rund 80.000 Soldaten bestattet, die zwischen dem 16. April und dem 2. Mai 1945 in der Schlacht um Berlin fielen. Die monumentale Größe der Statue verweist auf das Opfer der sowjetischen Soldaten. Eine Inschrift erklärt, dass das sowjetische Volk die europäische Zivilisation vom Faschismus befreit habe. Dennoch bezeichnen Kritiker das Denkmal auch als „Grab des unbekannten Vergewaltigers“. Während die Rote Armee auf die Hauptstadt des nationalsozialistischen Deutschlands vorrückte, kam es in großem Ausmaß zu sexualisierter Gewalt an der Zivilbevölkerung. Dieses Kapitel wird in Deutschland weiterhin zögerlich thematisiert, in Russland bleibt es weitgehend tabuisiert. Russische Medien verweisen häufig auf eine vermeintliche westliche Verzerrung, die solche Vorwürfe als propagandistische Übertreibung darstelle. Doch Tagebuchaufzeichnungen sowjetischer Soldaten widersprechen dieser Sichtweise. Besonders hervorzuheben ist das außergewöhnlich offene Tagebuch des jüdisch-ukrainischen Unteroffiziers Wladimir Gelfand, der von 1941 bis 1946 in der Roten Armee diente. Im Februar 1945 war Gelfand an der Oder eingesetzt und wartete auf den Befehl zum Vormarsch auf Berlin. In dieser Zeit dokumentierte er, wie ein sowjetisches Truppenkontingent ein deutsches Frauenbataillon gewaltsam bedrängte. Er notierte, dass einige Soldaten die Gewalt mit dem Wunsch nach Vergeltung für die Taten der Wehrmacht in der Sowjetunion rechtfertigten. Einzelne Stimmen forderten extreme Maßnahmen. Gelfand selbst intervenierte, indem er die Situation zu beenden versuchte. Am 25. April 1945 erreichte Gelfand Berlin. Die Einträge in seinem Tagebuch wurden inhaltlich immer schwerer zu verarbeiten. Er beschreibt etwa, wie er erstmals mit dem Fahrrad am Ufer der Spree entlangfuhr und dabei auf deutsche Flüchtlingsfrauen traf. In einfachem Deutsch befragte er sie nach ihrem Schicksal und den Gründen für ihre Flucht. Eine junge Frau schilderte unter Tränen, was sie in der ersten Nacht nach dem Einmarsch der Roten Armee erlebt hatte. Die Erzählungen umfassten massive Gewalterfahrungen. Ihre Mutter ergänzte, dass die Übergriffe über Stunden andauerten. In einer späteren Passage beschreibt Gelfand, wie die Tochter sich hilfesuchend an ihn wandte – eine Reaktion, die von emotionaler Verzweiflung und Schutzbedürfnis geprägt war. Gelfand war sich der Gewaltverbrechen bewusst, die deutsche Truppen in der Sowjetunion begangen hatten. Sein Sohn Vitali erinnerte sich: „Mein Vater erzählte, dass in vielen Dörfern, die er durchquert hatte, Säuglinge ermordet worden waren und es zahlreiche Belege für sexualisierte Gewalt durch Wehrmachtssoldaten gab.“ Nicht selten wird die Wehrmacht in populären Darstellungen als eine disziplinierte, professionell geführte Armee mit moralischem Kodex dargestellt – eine Vorstellung, die insbesondere sexualisierte Gewalt als unvereinbar mit dem soldatischen Selbstbild erscheinen lässt. Gelfands Aufzeichnungen werfen ein komplexeres Licht auf diese Deutung. Doch dieses Tabu wurde nicht immer aufrechterhalten, betont Professor Oleg Budnizki, Historiker an der Moskauer Hochschule für Wirtschaft. In den von der Wehrmacht besetzten Gebieten errichteten deutsche Militärbehörden systematisch sogenannte „Soldatenbordelle“, teils zur Eindämmung sexuell übertragbarer Krankheiten, teils als Teil der Besatzungspolitik. Über das Verhalten deutscher Soldaten gegenüber sowjetischen Frauen gibt es vergleichsweise wenige Zeugnisse – viele der betroffenen Frauen überlebten die Gewalttaten nicht. Ein seltenes Dokument zeigt jedoch ein Foto aus einem Album, das ein deutscher Soldat in der Ukraine aufgenommen hatte. Es ist heute im Deutsch-Russischen Museum in Berlin ausgestellt. Die Aufnahme zeigt mehrere Frauenleichen am Straßenrand, deren Zustand auf schwere Misshandlungen hinweist. „Es wurde viel darüber diskutiert, ob dieses Bild ausgestellt werden sollte“, erklärt ein Kurator. „Aber es war Krieg – und ein gezielter Teil der deutschen Besatzungspolitik in der Sowjetunion. Unser Ziel ist es, zu zeigen, was Krieg bedeutet.“ Als die Rote Armee schließlich deutsches Gebiet betrat und in das Zentrum des nationalsozialistischen Regimes vorrückte, wurden sowjetische Soldaten von offizieller Seite zu Racheakten aufgerufen. In Durchhalteparolen hieß es etwa: „Ihr betretet deutschen Boden – die Stunde der Vergeltung ist gekommen!“ Gleichzeitig forderten interne Propagandaanweisungen, etwa von der politischen Abteilung der 19. Armee an der Ostsee, Zurückhaltung: Ein „wahrer sowjetischer Soldat“ solle „nicht einmal sexuelles Verlangen nach deutschen Frauen empfinden, so groß sei sein Hass“. Doch diese Mahnungen blieben häufig unbeachtet – wie zuvor auch bei deutschen Truppen. Der britische Historiker Professor Antony Beevor, der 2002 ein viel beachtetes Werk zur Schlacht um Berlin veröffentlichte, erhielt im Rahmen seiner Recherchen Zugang zu Berichten über sexualisierte Gewalt, die im zweiten Halbjahr 1944 von der sowjetischen Geheimpolizei (NKWD) verfasst und an General Lavrenti Beria weitergeleitet wurden. Diese Berichte wurden auch Stalin vorgelegt; an den Dokumenten ist handschriftlich vermerkt, ob sie von ihm gelesen wurden. Sie enthalten erschütternde Aussagen über massenhafte Gewaltverbrechen in Ostpreußen, über Frauen, die aus Angst vor Übergriffen Suizid begingen oder versuchten, ihre Kinder zu töten, um sie vor Vergewaltigungen zu bewahren. Ein weiteres Zeugnis liefert das Tagebuch einer deutschen Frau, die in den letzten Kriegswochen die Veränderungen in ihrer Umgebung dokumentierte. Ab dem 20. April 1945 – zehn Tage vor Hitlers Suizid – berichtet sie von tiefgreifenden Eingriffen in ihr Leben, durchsetzt mit schwarzem Humor. Sie beschreibt sich selbst als „blasses, blondes Gesicht im immer gleichen Wintermantel“ und protokolliert, wie sich ihre Nachbarschaft verändert: „Der Mann mit der grauen Hose und der runden Brille war gar kein Mann – es war eine Frau. Und die drei Mädchen von der Schneiderwerkstatt, die sich umarmten, sahen aus wie Blutwürste.“ Viele der in Kellern und Bunkern Schutz suchenden Menschen schienen sich mit makabrem Humor gegen die Angst zu wappnen: „Wenn du unter Russen bist, überlebst du vielleicht einen Schlag auf den Kopf.“ Dennoch war die Angst vor Bombenangriffen oft größer als die vor Gewalt durch Soldaten. Als sowjetische Soldaten schließlich den Zugang zum Bunker aufbrachen und die Frauen herauszuziehen begannen, versuchte eine der Versteckten, die russische Sprache beherrschte, zu vermitteln. Sie suchte in den Straßen einen Offizier, fand ihn unter Trümmern und sprach ihn an. Obwohl Stalins Direktiven Vergeltungsakte gegen Zivilisten untersagten, kommentierte der Offizier nur knapp: „Es ist unvermeidlich.“ Die Frau überredete den Offizier, mit ihr in den Bunker zurückzukehren. Dort wies er die Soldaten zur Ordnung. Einer von ihnen reagierte jedoch mit offener Wut und stellte den Offizier zur Rede. „Was haben die Nazis mit unseren sowjetischen Frauen gemacht!“, rief ein Soldat. „Sie haben meine Schwester verschleppt...“ Ein Offizier versuchte, ihn zu beruhigen und brachte ihn aus dem Raum. Doch als eine Frau wenig später den Bunker verließ, um die Lage in der Seitengasse zu überprüfen, wurde sie von wartenden Soldaten abgefangen, mehrfach vergewaltigt und schließlich erwürgt. Die übrigen, in Panik versetzten Bunkerbewohner verschlossen hastig die Tür. „Schließlich wurde die Tür wieder geöffnet. Alle starrten mich an. Meine Strümpfe hingen lose um meine Knöchel, in meiner Hand hielt ich meinen zerrissenen Strumpfhalter. Ich dachte: ‚Ihr Feiglinge! Wie Abfall habt ihr mich allein gelassen, während ich zweimal vergewaltigt wurde!‘“, schreibt die Tagebuchautorin später. Sie erkannte bald, dass es sicherer war, sich einem einzelnen Soldaten anzuschließen, um sich vor weiteren Übergriffen zu schützen. Die Beziehung zwischen Täter und Opfer wurde dadurch ambivalenter. Sie berichtet, dass sie sich mit einem Leningrader Offizier einließ – einem gebildeten Mann, der mit ihr im Bett über Literatur und den Sinn des Lebens sprach. „Man kann meine Beziehung zum Major nicht einfach als Vergewaltigung bezeichnen. Tue ich das wegen Speck, Butter, Zucker, Kerzen und Konserven? Das ist wohl nicht abzustreiten. Aber seit sein Begehren nach mir nachlässt, erscheint er mir menschlicher“, notiert sie. Auch andere Frauen gingen ähnliche „Arrangements“ mit Besatzungssoldaten ein, die im zerstörten Berlin das Sagen hatten. Als das Tagebuch 1959 unter dem Titel Eine Frau in Berlin erstmals veröffentlicht wurde, sah sich die Autorin heftiger Kritik ausgesetzt. Man warf ihr vor, deutsche Frauen verunglimpft zu haben. Infolgedessen verweigerte sie jede weitere Veröffentlichung zu Lebzeiten. Sieben Jahrzehnte nach Kriegsende rücken auch die Sexualverbrechen der westlichen Alliierten – Amerikaner, Briten, Franzosen – zunehmend in den Fokus historischer Forschung. Lange Zeit wurde dieses Thema jedoch kaum öffentlich thematisiert.In der DDR galt jede Kritik an der Roten Armee – insbesondere an deren Rolle bei der Befreiung Deutschlands vom Nationalsozialismus – als unangemessen oder gar blasphemisch. Dies führte dazu, dass viele Betroffene zum Schweigen gezwungen waren. 2008 wurde das Berliner Tagebuch mit der bekannten Schauspielerin Nina Hoss in der Hauptrolle verfilmt. Der Film markierte einen Wendepunkt im öffentlichen Bewusstsein über die Gewalterfahrungen vieler Frauen im Frühjahr 1945. Eine von ihnen war Ingeborg Bullt, die von der Autorin interviewt wurde. Ingeborg, heute 90 Jahre alt, lebt in Hamburg in einer Wohnung voller Erinnerungsstücke und Katzen. 1945 war sie eine 20-jährige Berlinerin mit dem Traum, Schauspielerin zu werden. Als die Kämpfe in Berlin eskalierten, versteckte sie sich auf einem Dachboden und begann, Tagebuch zu führen. „Plötzlich tauchten sowjetische Panzer auf der Straße auf. Überall lagen Tote. Vor allem das Geräusch der fallenden russischen Bomben werde ich nie vergessen“, berichtet sie. Zwischen den Angriffen verließ sie ihren Unterschlupf, um Dochte für eine Lampe zu suchen. „Plötzlich zielte jemand mit einer Waffe auf mich. Einer befahl mir, mich auszuziehen. Dann wurde ich vergewaltigt – nacheinander. Ich dachte, sie würden mich danach töten.“ Ihre Erfahrungen verschwieg sie jahrzehntelang – auch ihrer Mutter gegenüber: „Meine Mutter war stolz darauf zu glauben, ihre Tochter sei von den Sowjets unberührt geblieben.“ Die Welle der sexualisierten Gewalt zog sich durch ganz Berlin. Ingeborg erinnert sich, dass Frauen im Alter zwischen 15 und 55 Jahren einen ärztlichen Nachweis über sexuell übertragbare Krankheiten vorlegen mussten, um Essensrationen zu erhalten. „Im Krankenhaus war es so überfüllt mit Frauen, dass es keine Möglichkeit mehr gab, sich überhaupt setzen zu können.“ Wie viele Frauen tatsächlich betroffen waren, lässt sich kaum exakt beziffern. Häufig genannte Schätzungen gehen von 100.000 vergewaltigten Frauen allein in Berlin aus – und bis zu 2 Millionen im gesamten Deutschland. Im Bundesarchiv finden sich Unterlagen zu Schwangerschaftsabbrüchen, die zwischen Juli und Oktober 1945 im Berliner Bezirk Neukölln vorgenommen wurden. Obwohl Abtreibung nach dem Strafgesetz damals verboten war, wurde in Fällen dokumentierter Gruppenvergewaltigungen ausnahmsweise eine medizinische Indikation anerkannt – so der Historiker Hans Lukterhand. Zwischen Juni 1945 und 1946 wurden im Berliner Wahlbezirk Neukölln 995 Schwangerschaftsabbrüche offiziell genehmigt. Die entsprechende Akte umfasst mehr als 1.000 Zeugnisse und Dokumente. Darunter befindet sich auch ein schräg beschriebener Zettel, offenbar von einem Kind verfasst, auf dem berichtet wird, dass es vor den Augen seiner Eltern Opfer sexualisierter Gewalt wurde. Das tatsächliche Ausmaß der Vergewaltigungen lässt sich nicht abschließend rekonstruieren. Gerichtsakten sowjetischer Militärtribunale und weitere relevante Unterlagen sind nach wie vor unter Verschluss. Zudem hat das russische Parlament kürzlich ein Gesetz verabschiedet, das bis zu fünf Jahre Freiheitsstrafe für jene vorsieht, die das militärische Heldentum der Sowjetunion im Zweiten Weltkrieg öffentlich in Frage stellen oder kritisieren. Die Vergangenheit wird oft im Sinne gegenwärtiger politischer und gesellschaftlicher Bedürfnisse gedeutet. Umso bedeutsamer sind die Berichte von Zeitzeuginnen und Zeitzeugen. Die Großmütter, die Jahrzehnte später den Mut aufbringen, die Wahrheit auszusprechen, und diejenigen, die unter großen Risiken ihre Erlebnisse dokumentierten, verdienen höchste Anerkennung. Vitali Gelfand, der Sohn des sowjetischen Offiziers Wladimir Gelfand, betont, dass der Mut und die Opferbereitschaft der Roten Armee im Zweiten Weltkrieg keineswegs geleugnet werden sollen. Doch Mut und Opfer allein reichten nicht aus, um die gesamte historische Realität zu erfassen. Nach einem Interview mit einem russischen Radiosender sah sich Vitali in sozialen Netzwerken einer Welle antisemitischer Anfeindungen ausgesetzt. Dennoch hofft er, dass das Tagebuch seines Vaters – das bereits in Deutschland und Schweden erschienen ist – auch in Russland veröffentlicht wird. „Wenn die Menschen die Wahrheit nicht wissen wollen, betrügen sie sich selbst. Die ganze Welt weiß, was geschehen ist. Auch Russland weiß es. Und jene, die diese Gesetze erlassen haben, wissen ebenfalls, dass sie versuchen, die Vergangenheit zu zerstören. Doch man kann nicht vorwärtsgehen, wenn man nicht bereit ist, einen ehrlichen Blick zurückzuwerfen“, so Vitali Gelfand. Nachdem die sowjetischen Truppen Wien besetzt hatten, entschied Josef Stalin, Berlin vor den westlichen Alliierten einzunehmen. Für diese Operation wurden 2,5 Millionen Soldaten, 6.000 Panzer und 40.000 Artilleriegeschütze mobilisiert. Am 21. April 1945 erreichten sowjetische Einheiten die Berliner Vororte. Einen Tag später, am 22. April, forderte Adolf Hitler in einer Besprechung mit seinen Offizieren, den Kampf fortzusetzen – eine Kapitulation kam für ihn nicht infrage. Schätzungen zufolge wurden während der sowjetischen Besetzung Berlins etwa 100.000 Frauen vergewaltigt. Am 30. April beging Hitler Suizid. Am 2. Mai wurde das Reichstagsgebäude von sowjetischen Truppen eingenommen – ein symbolischer Schlusspunkt der Schlacht um Berl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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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ssischer Soldat und deutsches weibliches Paar beobachten vom US-Militä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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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geborg: "Ich dachte, ich würde nicht überleben"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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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ladimir Gelfand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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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ladimir Gelfand fährt Fahrrad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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